<어느 의사의 이야기>
10여 년 전 쯤,
내가 진주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때의 이야기다.
공사장에서 추락사고로 뇌를 다친 26살의 젊은이가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왔다.
이미 그의 얼굴과 머리는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고,
의식은 완전히 잃은 후였다.
서둘러 최대한의 응급 조치를 했으나 살 가망은 거의 없을것 같았다.
심전도를 체크하는 기계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나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규칙적이고 정상적인 심장박동을 나타내던 ECG(심전도)곡선이 갑자기 웨이브 파동(V-TACH)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곧 죽음이 가까이 옴을 의미했다.
보통 이러한 ECG의 곡선이 나타난 이후,
10분 이상을 살아있는 이는 본적이 없었다.
그의 운명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느낀 나는
중환자실을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
환자가 운명할 때가 되었으니 와서 임종을 지켜보라고 일렀다.
젊은이의 부모님과 일가 친척인듯한 몇몇 사람들이
슬피 울며 이미 시체나 다름없이 누워있는 그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중환자실을 나왔다.
간호사에게는 심전도 파동이 멈추면
곧바로 영안실로 옮기라고 일러두었다.
다른 환자를 보고난 후 그 중환자실을 지나치면서
나는 깜짝 놀라지않을수 없었다.
1시간이 지난 아직도 그의 심장 박동이 느린 웨이브 파동 ECG를 그리면서 살아있는 것이었다.
다음 날, 물론 지금쯤은 아무도 없는 빈 침대이거나
다른 환자가 누워있으리란 당연한 생각으로였지만
왠지 그의 생각이 머리 속에 떠나지 않음은 스스로 부정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그가 있었다.
더없이 나약하지만 끊이지않는 ECG곡선을 그리며
그의 영혼은 아직 그의 몸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본 나는 무언가를 느꼈다.
왠지 이 세상에서 그가 쉽게 떠나지 못할 그 어떤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하루가 다시 그렇게 지나고 그의 심전도가 웨이브 파동을 그린지 장장 이틀이 지났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중환자실에 다시 가보았다.
그의 신체는 죽은것과 다름 없었지만 영혼은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더없이 미약하게나마 이 세상에 오래도록 머물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한 젊은 여인이 중환자실로 들어왔다.
이제까지 보호자중에 없었는데,
마치 멀리서 갑작스런 연락을 받고온듯했다.
젊은이의 애인인듯했는데 넋이 나간사람처럼 제대로 환자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나는 옆으로 비켜주었다.
젊은 여인은 말없이 눈물 을 흘리며 가까스로 침대 옆에 섰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심전도 파동이 멈추었다.
모니터 화면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던 웨이브 파동이
한순간 사라지고 마치 전원이 꺼진 것같은
한줄기 직선만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틀간 미약하게나마 뛰어왔던 그의 심장이 바로 그때 멈춘 것이엇다
이젠 정말로 이 세상을 떠난 그와 그의 곁에 남겨진 여인을 두고 나는 중환자실을 빠져나왔다.
그의 임종소식을 전하고 나는 보호자중의 한 사람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결혼한 지 3개월에 접어드는 그의 부인이었고
뱃속에 아기를 임신중이었다.
놀라움과 마음 속 깊숙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밀려옴을 느끼며 그 순간 나는
내가 해야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야기해 주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당신과 뱃속의 아기를 만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며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
얼마나 힘겹고 가슴 아픈 영혼의 기다림이었는지...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간직한 한 영혼이
바로 우리곁을 떠나는 순간이었다..